영화 '변호인'과 부산 학림사건 (부림사건)

2014. 1. 14. 08:47시사 및 문화

역대 크리스마스 관람객 최고를 기록하는데, 일조하며 '변호인'을 관람하였다. '예매취소', '송강호 외압', '평점 테러' 등 다양한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그야말로 핫한 영화이다.  현재 아바타의 흥행성적을 뛰어넘고, 최고의 속도로 관객수를 달성하며 나아가고 있다. 어제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르신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을 보니, 1000만의 달성에는 전혀 의구심이 없어도 될 듯하다. 어제 기억을 되살리며,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 흐름을 제시하고, 그와 더해 실제 사건과 몇가지만 비교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부 스포일러 있음)

 

 

 

 

1. 기본 내용

 

영화는 송변의 과거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힘든 가정 환경에서 사법시험을 통과 한다. 실제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법시험 합격 스토리를 참조하면 열악한 가정환경으로 낙방을 하고, 일반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고시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결혼과 출산 등 많은 일을 겪고, 당당히 사법고시를 통과한다. 그해 사시 합격자 중 유일한 고졸 출신이었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듯 송변은 대전에서 판사를 잠시 지내고,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일반적인 변호사가 '격이 맞지 않던' 등기와 세무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임하였다. 또한, 그러한 선택은 그룹내에서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오고 학연이 취약한 송변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과 결과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스토리 구성을 위해 매개체가 된 국밥집 이야기. (이 부분은 허구라고 판단)

실제 모티브가 된 '부산 학림사건'과 주인공을 극적으로 만나게 한다. 국밥이 너무 자주 나온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국밥집을 찾아가게 된다는게 헛말이 아니었다. 국밥집의 아들이 가장 메인 테마인 '부림사건'의 피고인이 되며 스토리를 이끌어 가게 된다.

 

 

 

검찰과 변호인, 판사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등장 인물들이 흥미롭다. 사건 관련 내용을 서칭하다 보면 주요 인물로서 매칭이 되는 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위의 사진에 등장하는 차동영 경감(곽도원 역)의 경우 대공 담당 경감으로써 최고의 악역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는 주도한 관련자는 몇몇 있지만, 정확히 차경감의 역할과 매칭이 되는 인물은 없다고 한다. 또한, 마지막에 정점을 찍으며, 극적으로 등장하는 증인의 경우도 반전과 반전을 만드는 극화된 인물일 것이다.

 

 

 

영화의 결말과 기본적인 틀은 실제 사건 진행과 크게 다르지는 않는 것 같다. 중간 중간 몇가지 에피소드, 그리고 대사들을 인용하였고, 영화에서와 같이 실제 상당히 흥분된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요트 이야기, 재판中 알리 대사, 불온 서적

그리고, 구치소 전 대공분실로 사용된 공간의 간판 등 실제에서 모티브를 따온 부분이 많다.

 

영화 러닝타임은 2시간이 조금 넘는데, 시간이 상당히 빠르게 흘러간다. 특별히 군더더기가 많지 않고 이야기 전개도 빠르며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부분인 '저런 에피소드도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흥미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감초같이 빠지지 않는 오달수의 코믹연기도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실제 사건을 큰 줄기로 하는 이 영화 '변호인'은

 

10~20대에게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30~40대에게는 미래에 대한 준비를

50~60대에게는 과거에 대한 추억(?)을 - 좋지않은 기억이다.

 

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3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아직까지 현재에 비추어 생각할 부분이 있으며, 그와 맞물려 더욱더 큰 흥행을 불러오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2. 실제 사건

 

부림사건이란?

 

'부산의 학림(學林) 사건'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1981년 3월 출범한 제5공화국의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 초기에 통치기반을 확보하고자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던 시기에 일어난 용공(容共) 조작사건이다. 1981년 9월 부산 지검 공안 책임자인 최병국 검사의 지휘하에 부산 지역의 양서협동조합을 통하여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교사·회사원 등을 영장 없이 체포한 뒤, 짧게는 20일에서 길게는 63일 동안 불법으로 감금하며 구타는 물론 '물 고문'과 '통닭구이 고문' 등 살인적 고문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서모임이나 몇몇이 다방에 앉아서 나눈 이야기들이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단체의 '이적 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로 날조되었다.

그해 9월 7일 이상록(부산대 졸업, 선반공)·고호석(교사)·송세경(회사원)·설동일(농협 직원)·송병곤(부산대 졸업, 공원)·노재열(부산대 4년)·김희욱(교사)·이상경(부산대 1년) 등 8명이 1차로 구속되었고, 10월 5일 김재규(상업)·최준영(설비사무사)·주정민(부산대 졸)·이진걸(부산대 4년)·장상훈(부산대 졸업)·전중근(공원)·박욱영(부산공전 졸업)·윤연희(교사) 등 8명이 2차로 구속되었다. 또 이듬해 4월 도피중이던 이호철(부산대 졸)·설경혜(교사)·정귀순(부산대 졸업)등 3명이 3차로 구속되었고, 대학 시위중에 구속된 김진모·최병철·유장현(이상 부산대 4년)과 탈영병 김영까지 연루되어 모두 22명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에는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와서 처음 대면하였을 정도로 무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검사측은 이들에게 국가보안법·계엄법·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하여 징역 3~10년을 구형하였고, 재판정은 5~7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 당시 변론은 부산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김광일·문재인 등이 무료로 맡았는데, 특히 노무현은 고문당한 학생들을 접견하고 권력의 횡포에 분노하여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이들은 1983년 12월 전원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으며, 이후 부산 지역 민주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2000년대 이후 사법부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어 재심 판결을 받았다. 사건 피해자들은 1999년 사법부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었다. 그러나 2006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다시 재항고해 2008년 대법원에서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재심 판결을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 참고사항 (당시 시대적 배경)

 

[1979년 부마항쟁] 부산 및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한 시위사건
[1979년 10·26사태]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사건

[1979년 12·12사태]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쿠데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상계엄확대조치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4·13호헌조치」발표 후, 그해 6월 10일을 정점으로 20여 일 동안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중항쟁이자 민주화운동

 

유신정권이 극에 달하고, 박정희 전대통령 살해 사건 후, 전두환의 쿠데타로 집권. 그리고, 또다시 민심을 누르기 위한 일련의 활동이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사건인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 유혈사태를 맞게되었으며, 그 후 부산에서 다시 제2의 부마항쟁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이다. 결국 '민주화'를 막는 것은 '빨갱이' 카드 밖에 없었다. 이게 과연 단순히 과거의 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에 80년대의 노무현 전대통령의 활동을 참고하면,

 

19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19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볍률상담소’도 차렸다. 19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지하다시피하고 운동에 전념해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항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해 9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파업 중 거리시위를 나왔다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자, 임금협상과 보상 등 문제와 관련해 노동자들을 도왔다. 이것이 문제가 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됐다가 23일 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지역 개업 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됐다.

 

출처: 노무현 재단

 

3. 마치며

 

위의 실제 사건에 등장한 인물들을 보면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있다. 등장인물은 아니지만, 주사건의 모태가 되는 학림사건의 판사 현 5선 국회의원 새누리당 대표 황우여, 부림사건의 검사 3선 국회의원 최병국. 우리 나라가 가장 취약한 것이 이러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과거 일제강점기와 유신정권 시절을 모두 포함하여 근현대사에서 정말 누가 국가를 위해 노력을 한 것인가. 누가 상을 받고,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청산이 안된다. 속칭 '과거에 연연하지말고, 미래를 봐야한다'는 미사여구로 포장될 뿐이다. 그렇다면 반복되는 역사속에 또다시 국가의 위기가 찾아온다면 과연 현재의 교훈은 어떠한 결과를 낳게될 것인가?

 

정작, 투표나 실제 결과를 보면 무엇이 맞고 무엇이 정의인가도 헷갈릴 수 밖에 없다.

 

정반합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모두 자기의 역할을 가진 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극장내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주인공 송변에게 고인을 투영시키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이 그러한 눈물을 만들 것이다. 가슴이 아프고 답답해할 수 도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보통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딪게 되었다.

 

1000만 관객 달성을 기원하며...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함으로써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관련추가 포스팅

변호인 관객수 1000만 달성 가능한가 http://honeypapa.tistory.com/53

 

참고

노무현 재단 http://www.knowhow.or.kr/